편지

 안녕하세요.

오늘 만남은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사실 얘기하면서도 나누었지만 창작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그리고 창작자로서 느껴지는 동질감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 그렇게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 너무 즐거웠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주변에 다들 20대 초반의 애기들이라서..정말 자주 할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데,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음...하아, 제가 아시다시피 시건방이 정말 충만한지라....음...이런 이야기는 정말 좀 저렴해 보일수 있지만..

오늘 한 이야기 중에서 좀 해명..? 해명을 좀 해야 할듯한 것들이 있어서 이런 지나간 이야기를 또 멋쩍게 끄집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음..이런 이야기는 정말 하루종일, 아니 하룻밤 지나고 다음날 만나서 이야기하고싶을 정도로 즐겁고, 또 그만큼 할 말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지나간 이야기에 대해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음..혹시 C.S.루이스에 대해서 잘..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C.S.루이스의 대부분 책이 그렇듯이 C.S.루이스는 편지를 굉장히 많이 남겼습니다. 심지어 책을 집필할때도 가상의 인물을 정해놓고 편지를 쓰듯이 책을 집필하기도 했지요. 뭐..여담으로 남기자면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서 보는데 좀 짜증나지만. 어쨌건 그런 것처럼 편지를 드릴까 생각하였습니다. 어줍잖게 C.S.루이스 흉내를 내고 싶었나 보다 생각해 주세요^^;


오늘...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유주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잘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마도 요즘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들었다라는 이야기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런말을 합니다. 예를들어..오늘 이야기에서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신학과의 교수들은 사실 70~80%정도가 신앙이 없다느니, 유럽같은 경우 벌써 자유주의로 넘어갔느니, 연세대 신학과는 이미 벌써 자유주의(쉽게 말해서 타협해 버린 변절자라는 뉘앙스가 강하지요.)에 물들어 버렸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그리고 그런식의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그리고

그러면 사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저 나름의 변명을 좀 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우선 자유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지 않을수가 없군요.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신앙에 있어서 자유주의, 특히나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자유주의란 마치 이단에 가까운 사람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우스운 사실은 이른바 자유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신앙인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절대 자유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라고 불리우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인데요, 자유주의자란 말 그대로 성경과 신앙에 대해 너무나도 근거없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고 자신의 선택과 기준, 논리에 의해 선별하여 신앙을 받아 들이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자는 신앙의 교리와 가르침에 있어서

(특별히 성경에 대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자신의 기준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거절해 버리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성경의 기적에 대해서 불신하며, 교리에 대해 전통적인 가르침에 자신의 논리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면 그것은 거짓, 혹은 적당히 철학적인 것으로 포장해 버리며 얼버무리는,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천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자,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마땅히 해야 할것입니다. 그럼 양수킴이 말한 자유주의자와 일반적인 한국 개혁교회(개신교 교회)의 평신도가 비판하는 자유주의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그전에 우선 그럼 왜 이른바 연세대학교, 그리고 신학교의 교수들이 자유주의자로 매도 당하는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아무래도 힘의 논리이죠.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나 한국의 개혁교회의 성향은 미국식 근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성경을 경직된 마음으로 보는 성향이 강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메여있으며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경향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약하고(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자에 비해)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논리가 빈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범하기 쉬운 오류가 성경에 나와있는 표면상의 모습에 집착하기에 때로는 비도덕적인 비논리적인 교리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서슴없이 따르는 경향이 강하지요. 좀 미안한 말이지만 한국의 개혁교회 목회자들이 이러한 비논리성, 그리고 막연한 이론을 마치 신앙의 미덕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좀 비논리적이라도, 좀 말이 안되더라도, 좀 비도덕적이라도 그것이 기독교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 즉 어떠한 범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신앙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언뜻 보기엔 굉장히 독재적이고, 폭력적이고(구약의 역사를) 그리고 교리안에 갇힌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종교인가요? 기독교라는 종교는 늘 자신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선한것이라고 말하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인가요? 기독교는 이것이 정의로운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내편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한 편을 가르는 독선적인 종교일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러한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이른바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근본주의자들 눈에 진보 신앙가들은 가히 이단에 가까운 사람들일것입니다. 특히나 오늘 말씀 드렸다시피 사교회(공교회의 반대개념)인 개혁교회에서 한 교회의 목사는 굉장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수 있지요.


두 번째, 신앙과 신학에 대한 혼동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제..목회자가 되는 과정이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던 어떤 크리스천은 좀 더 신앙심을 강화시키기 위해 신학대학교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신앙에 대해선 가르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을 하고, 그리고 억지로 목회자가 되어 교회로 파송된 다음 하는 말들이 신학교의 교수들은 신앙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신학에 대해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와 신학은 엄연히 다릅니다. 신앙은 개인적일수 있고, 체험과 경험, 그리고 때로는 비논리적인 요소를 수반할수 있습니다.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 과연 이게 논리적인가요? 증거가 있나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믿기에’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학은 좀 다릅니다. 목회자가 왜 신학을 배워야 할까요? 목회자가 목회를 잘 하려면 신앙력을 극대화 시켜서 일등신자가 되는 것이 목회에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목회라는 것은 많은 회중들을 인도하는 직업입니다. 많은 회중.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각자의 살아온 길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그만큼 각자의 신앙의 정도와 색깔이 다르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러한 각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른바 공동체를 이루었을때..만약 어떠한 충돌이 일어났을때 무엇을 근거로 이 충돌과 대립을 해결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신학이 가지는 힘입니다.


요즘은 수많은 사람들이 개론은 모른체 강론만 이야기 하는 시대입니다. 특히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욱더 존중되면서 각자의 주장은 더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게 되지요. 그렇기에 더 성숙한 서로간의 조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경험과 경험이 충돌하면 결국 남는 것은 없지요. 그렇기에 이 모든 강론을 아우를수 있는 개론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수많은 회중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길과 절충안 그리고 애매하고 때로는 개인의 경험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신앙’이라는것에 기준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목회자가 신학을 배우는것이지요, 요즘들어선 그저 목회자 라이센스 딸려고 울며 겨자먹기로 배우는 정도지만...그래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성경읽고 울면서 대성통곡으로 기도하며 앞장서서 새벽기도 하루도 안빠지고 나오는 모범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이라는 조금은 모호한 존재의 섭리에 대해 어떻게 신자들에게 이야기 할것인가를 연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저 성경에 이렇게 나와있으니 복받는다 이야기 하는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배타성과 보편성의 충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그리스도교는 점점 더 배타성을 띄면서 기독교의 교리는 점점 더 보편적 선, 보편적 도덕적 가치와 점점 더 멀어져 가게 됩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점점 이른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접점이 멀어짐을 느끼고 이른바 보편적인 진리탐구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발전시키려 노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건 CCC로서도 매우 중요한 사항인데 우리가 이른바 자유주의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교적 목적을 띄고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같이 호흡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보다 더 공정하지 못한 주먹구구식의 교리를 펼치고 있을때에 이것의 간격을 줄이고 세상사람들과의 접점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하고자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진보적인 교리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럼 과연 어디까지 양보할것인가가 논제가 되지요. 한가지 분명한건 우리가 믿는 성경엔 분명히 유일신 사상이 뚜렷하게 나오고 있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주신분은 예수님이 유일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나뉘게 되는것이지요.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는 그러한 불편한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별해 버립니다. 하지만 진보신앙가들은 다릅니다. 이러한 불편한 테이블을 피하지 않은체 끝까지 고민하는 사람이 바로 진보 신앙가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욕하는 연세대 신학과 교수들, 신대원 교수들입니다. 정말 신앙가는 너무나도 쉽게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고민하고, 때로는 온전하지 못한 대답을 침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탐구하고 그 길의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저 변절자라고 불리니...참으로 가슴이 답답한 노릇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조금...좀 강한 예시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매번 예배때 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늘 좋으신분이라는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역시 이러한 고백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신앙은 ‘맞어,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시지. 할렐루야.’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신학은 ‘그게 정말인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가요? 그럼 왜 이 세상의 불의와 부정의가 판을 칠까요? 하나님이 버젓히 살아계신데..이세상이 이렇게 악한 것은 누구 책임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이 세상이 부정의 하고 악한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악한 분이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100% 의롭게 하실만큼 힘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이들은 하나님께선 자신들의 백성을 위해서 그러한 역경과 고난을 남겨 놓으시고 연단시기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난과 역경...죄없는 자식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은 가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역경은...연단인가요? 연단은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요. 연단과 철저하게 부셔버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일입니다. 얼마전에 대구에서 왕따 문제로 자살한 학생에 대한 뉴스가 생각나네요. 그럼 과연 하나님은 이 자살한 부모를 연단시키기 위해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것일까요? 그게 과연 연단인가요? 도스토 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의 대사가 생각나네요. ‘어린아이의 피가 묻은 구원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드리는것이다.“(이러한 문제를 신학에선 신정론-신의 정의로움에 관해 논하는-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소설에나 나오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의 영역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우리를 더 당황하게 만들지요.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인식의 한계를 지닌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키에르 케고르부터 시작된 개인의 신앙에 대한 중요성, 모든 인간은 신앞에 단독자로 서야 한다.같은 주장들이(물론 이것도 개인주의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지만...)우리의 신앙을 자꾸 개인의 신앙으로 좁혀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분명히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의 하나님만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에 대해서 탐구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단순히 체험과 경험에서만 인지하는 하나님이 아닌, 역사적으로 축적되며 증명되어온 탐구되어온 하나님, 그리고 앞으로 발견하게 될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하나님’을 완성해 나갈수 있지 않는가 생각을 합니다.



CCC역시 마찬가지입니다. CCC의 가치가 무엇인가요? 바로 함께 진리의 길로 걷기를 원하며 그렇기에 진리되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가요? 그렇기에 일단 전하고 보자가 아닌 그들과 함께 공감할수 있는 하나님의 상(image)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고학번, 간사님같은 경우엔 이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VF 같은경우엔 아예 이러한 논제만을 따로 고민하는 연구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IVF의 이상적인 리더상 역시 탐구하고 공부하는 리더를 꼽구요. 더 이상 옛날처럼 그냥 믿어라, 무조건 믿어라, 나는 좋더라,라고 말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더욱어 분명히 탐구하면 할수록 그들과의 접점을 발견하게 되고 더욱더 선명한 하나님의 상을 밝혀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가장 이상적인 신앙의 형태를 구도자(求道者-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 불교용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늘 탐구하고 사색하며 삶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찾아 걸어가는 사람. 단순히 기독교하는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 아닌, 아직 나는 진리에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지만 열심과 열정을 다해. 때로는 헤메는 한이 있더라도 의지를 다하여 길을 걸어가는, 때로는 방향성에 헤메일때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가진 구도자야 말로 뭐랄까?.,,,,.순장의 모습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걸어가본 만큼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에게도 이만큼 어떻게 오라고 말 할수 있기 때문이니깐요.





너무 긴 글...사실 이렇게 까지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아까도 말씀 드렸다 시피, 이런식의 주제로 이야기 하는 것이 저 역시 흔치 않기 때문에 너무 신나서 막 생각없이 두서없이 적어버린 것 같습니다. 좀 부끄럽네요.

하여튼..뭐.. 그렇습니다^^. 조아라 간사님 몸 건강히 잘 지내시고요. 앞으로 더욱어 하나님을 알아가는 간사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고, 하시는 사업 위해서도 기도 드리겠습니다.





2012년 1월 14일 김양수 드림


형스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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